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쥬피터[이주의 시인]/송승언 - 철과 오크 & 사랑과 교육

민음사 사랑과 교육 시집 추천 : 송승언 시인 - 천막에서 축사로

by 아주작은행성 2021. 8. 9.

  송승언 시인 / 민음사 - 사랑과 교육 수록

 

사랑과 교육

영혼 없는 세계에 건설된아름다운 가능성의 황무지2011년 《현대문학》 신인 추천으로 등단하여 첫 시집 『철와 오크』를 통해 시 독자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긴 시인 송승언의 두 번째 시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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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막에서

축사로

 

함께 걸었다 목적 없는 것처럼 정말로 없었으니까

 

걷는 건 우리의 의식이었다 갈 곳 없이 갈 데까지 가 보는 일

도시 건물의 그림자가 우리 어깨를 덮을 때 우리는 우리가 있던 농촌을 생각하며 눈 감았다 눈 뜨면 거기에 성장중인 푸른 벼들이 있었으니까

걸어가며 논밭은 민족의 풍경이라 말하고

논두렁 옆에서 썩어 가는 컨테이너에 그려진 오망성을 보며 컨테이너 속에서 일어날 일에 대해 생각하면서

헐린 첨탐을 보면서

망가진 축사를 죽은 개를 보면서

우리는 걸었다 봄에서 여름까지 여름에서

가을 겨울까지

봄의 천막에서 여름 하우스로

가을 창고에서 겨울 축사로

한 마을의 초입으로 들어가 다른 마을의 초입으로 나오는 동안 우리는 일어나지 않을 일에 대해 생각했다

가령 함께 걷는 일 이미 함께 걷고 있지만

이런 상상 속에서나 걷는 일 말고

알고 보니 내가 그를 사랑하는 일 말고 여전히 네가 그를 사랑하는 일 말고

걷다 보니 더 걸을 수 있는 길은 없고 우리에게 남겨진 길이라곤 눈밭 위에 찍힌 개 발자국의 간격들밖에 없는

그 일어나지 않을 시간 속에서 우리는 안개 낀 논밭의 환상방황에 빠질 수 있었고

사람 없는 폐가를 고쳐 살 망상을 할 수 있었고 냄새와 위험을 결부시키지 않을 수 있을 미래에 대한 의견들을 가질 수 있었다

이건 우리가 가져 보지 못한 믿음에 대한 평가냐고 너는 물었어

사랑은 닿을 데 없어도 우리를 한없이 걷게 만들지만

사랑은 그래서 발을 망가뜨려 놓지만

한없이 걷다 주위를 둘러보면 아무도 없다

음악이 끝난 것처럼

그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일어났어야 할 일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살아갈 수 있는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해

의식을 마치기 위해 나는 조금 더 걸어야 했다

완공되지 않았던 도로 공사장이 있던 곳을 넘어

어떤 길일지 예상되지 않던 곳을 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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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는 일은 생각 정리에 도움이 된다.

화자는 상상속에서 봄의 천막에서 겨울 축사로 까지 함께 걷는다

걷다가 마을에 닿고 마을에서 일어나지 않은 우리가 걷는 일에 대해 생각한다

걷다보니 더 걸을 수 없는 길이 나온다. 상상의 끝. 

남겨진 길이라곤 개 발자국의 간격. 

끊어진 필름의 더렵혀진 반점 같은

 

멈춰서 환상에 빠진다

폐가를 고치고 위험하지 않는 미래에 대해 의견을 가져본다

상황을 더 낫게 하려는 믿음

 

사랑은 닿을 곳이 없어도 우리를 걷게 한다.

그래서 우리의 발을 사랑은 망가트려놓는다

 

끊임없이 걷다보면 너도 사라진다.

결말에 도달한다.

 

아마 결말에 닿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결말이 있을 거라는 이유만으로 우리는 살아갈 수 있을 것만 같다.

 

다만 이것은 의식의 결말

생각을 마치고 다시 걸어가기엔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한 일

 

생각의 끝에서 홀로 돌아간다

완공 되지 않았던 도로 공사장이 있던 곳을 넘어

어떤 길일지 예상되지 않던 곳을 넘어

 

축사를 넘어

창고를 넘어

하우스를 넘어

천막을 넘어

 

걸었다.

목적이 없는 것처럼

원래 목적은 정말로 없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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