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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6

오늘의 화자는 여행 지도를 펼칩니다. 여권 만들어 오세요. 6년 전 일입니다. 제가 다니고 있는 회사는 매년 해외로 단체 워크샵을 갔습니다. 1년 6개월 만에 퇴사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참석한 워크숍이었지만 저는 첫 해외여행에 가슴이 떨렸습니다. 목적지는 세부. 사실 일하느라 정신없어 세부가 어디인지, 여행 가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여행에서 뭘 느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도 없이 그저 여행사가 이끄는 대로 티켓을 받고, 환전 금액을 수령하고, 여권을 확인받은 뒤 비행기에 탑승했습니다. 비행기의 첫 느낌은 어..? 생각보다 작네… 버스랑 똑같네. 아니 더 작은가? 비행기에 대한 환상이 너무 커서였을까. 분명 미드나 영화에서 이미 비행기 장면을 보았는데. 어떤 구조인지 알고 있는데. 현실에서 마주한 비행기는 분주한 교통수단의 내부일 뿐였습니다... 2023. 6. 27.
오늘의 화자는 꽃봉오리를 터트린다. 허브에 꽃이 피었다. 3일동안 물을 주지 않아 죽을 뻔했던 적도 있었지만, 하루 루틴을 실행하면서 꼬박꼬박 물을 주자 잘 자라주었다. 하루에 한 번씩 잎을 따서 차를 마시고 회사에도 잎을 가져가서 차를 우려먹는다. 키우는 허브는 3가지. 페퍼민트, 초코민트, 애플민트. 다 맛있는 녀석들이다. 이 중 꽃이 핀 건 애플민트다. 허브를 키운지 두 달만에 하얀색 꽃이 피었다. 당근을 통해 이솝의 바디클렌저, 바디밤, 테싯 향수를 샀다. 좋아하고 써보고 싶은 브랜드였지만 가격대가 비싸 구매를 망설였다가 당근을 통해 먼저 접해보자는 생각에 덜컥 구매했다. 3개 제품 모두 시중가에 반값으로 구매했는데 구매 후 만족도는 200%가 넘는다. 은은하게 퍼지는 숲 냄새가 좋다. 테싯 이전에 향수는 토스 디 오리진을 쓰고 있.. 2023. 6. 25.
오늘의 화자는 누워있습니다.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계란과 당근 위주의 식단을 짰습니다. 절제를 통해 에너지를 비축하고 운동에너지를 얻습니다. 삶이 단순해지고 있습니다. 오늘 아침에는 대청소를 했습니다. 청소기가 컥컥 소리를 내며 큰 먼지들을 쏙쏙 넘깁니다. 입은 쉬는 일이 없고 끊임없이 식탐을 부립니다. 배가 고픕니다. 아무거나 먹지 못합니다. 정해진 음식을 먹습니다. 허기집니다. 몸통에는 먼지가 가득합니다. 계란으로 인해 가스가 차오릅니다. 몸통의 먼지를 탈탈 털어냅니다. 마침내 개운합니다. 빈 몸통을 눕히고 전원을 끕니다. 충전이 필요합니다. 오늘의 화자는 누워있습니다. 2023. 6. 20.
오늘의 화자는 지평선을 넘어갑니다. 혼자 있고 싶은 마음이 강해지는 날이면 까만 하늘을 올려다봅니다. 만약 내가 우주에 떠 있다면 기분이 어떨까요. 구름을 넘어선 까만 어둠. 텅 빈 칠하지 못한 밤 한가운데. 약속할게요. 멀리 가지 않고 돌아올게요. 잠깐만, 아주 잠깐만 우주에 다녀와도 될까요? 지구의 불빛들이 별들로 보이는 소우주. 우주복은 생각보다 불편하지 않네요. 살면서 내가 뱉는 호흡을 이렇게 뚜렷하게 들어본 적이 없어요. 혼자 있다는 두려움인지 빈 우주에 대한 경외감인지 모를 떨림. 아직 살아있군요. 왜 설레는 걸까요? 허둥대지 않고 눈을 크게 떠봅니다. 아아, 들리십니까? 여기는 우주입니다. 거기는 지구이지요? 우리는 서로를 먼지만큼 알고 서로를 먼지처럼 보고 있습니다. 먼지만 한 당신이 빛을 만들어 냅니다. 전등을 흔들어 인사.. 2023. 6. 16.
오늘의 화자는 요리를 하겠군요. 오늘은 정말 일하기가 싫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칼퇴근하고 저는 혼자 남아서 오후 4시에 떨어진 제안서 작업을 하고 있었거든요. 왜 나만 남아서 답도 없는 제안서 작업을 해야 할까. 대표님은 이미 4시에 퇴근하셨는데, 왜 나는 저녁을 시키며 9시가 되도록 회사에 있을까. 다른 사람들은 일이 없어서 칼퇴근하는 걸까. 왜 제안서는 항상 시간이 없을까. 이따 11시에 마감 청소 아르바이트도 가야 하는데 나는 언제 쉬지? 저는 어제 6시 30분에 퇴근했습니다. 다른 팀은 야근 중이었죠. 집에 가서는 유튜브를 보다가 잠이 들었고 11시에 아르바이트를 하러 갔습니다. 오늘의 저는 일찍 가서 마땅히 하고 싶은 것도 해야 할 것도 없는데 나는 집에 가고 싶어집니다. 하기 싫은 게 많아질수록 하고 싶어지는 게 많아집니다.. 2023. 5. 27.
민음사 사랑과 교육 철과 오크 시집추천 : 송승언 - 세계는 보존되어야 한다. 풀리지 않는 미제 사건 이곳에서 사건이 발생했었다. 피해자도 가해자도 없다. 심증도 물증도 없다. 단서는 타고남은 잿더미와 두 권의 책. 잿더미에 불을 켜본다. 책 속의 단서를 찾아가보자. 책 속에 가장 많이 나타난 것은 무엇인가. 불을 켜는 행위, 장소에 대한 증언과 진술의 반복. 반복. ​ 모닥불이 이곳을 밝히고 이곳을 비춘다. 도대체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가? ​ 1. 특정 기억에 대한 회고의 가능성 시인의 시가 특정 트라우마와 연관된 공간의 기억이라면 혹은 개인의 경험에 연관된 것이라면 감정이나 화자가 두드러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시인의 시 속 공간에는 상황에 대한 진술만 있다. 진술을 따라가면서 물체 혹은 상황이 나타나지만 나타난 물체/상황은 누구와 연결되거나 다른 것과 연관되지 않는다. .. 2021. 7.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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