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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고 플라스틱[시론평론공부]

비평집 : 박상수 - 너의 수만 가지 아름다운 이름을 불러줄게 part.1

by 아주작은행성 2021. 8. 3.
 

너의 수만 가지 아름다운 이름을 불러줄게

“슬픔과 고통, 아쉬움과 비판, 자책과 연민, 성찰과 전망.사랑과 그래도 또 사랑들 사이에서“박상수의 두번째 평론집. 현대문학상 수상작 수록한국 시의 새로운 흐름과 활기를 만들어내는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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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37 : '사회에서 내쳐지고 무시당하는 비자발적 난민'이 넘쳐나는 이 시대의 혼종적 정체성이란 그 미학적 가능성과 성취, 앞선 세대와의 차별점에서 만들어지는 윤리적 정당성과는 별개로, 시대 감각이라는 좌표를 놓고 보자면 예전만큼의 폭발력을 갖는 것은 이제 상당히 난ㄱ마한 일이 돼버린 것이다. 슬프게도 말이다. 미학은 따로 제 길을 가면 되는 것 아닌가. 그런 측면이 있을 것이다. 세상의 변화와는 별개로 시는 제 길을 가도 된다.

 

새로운 세대가 변화한 시대의 주역이 되지 못한다는 것은 특이한 일이다. 이에 대해서는 조금 더 애정 어린 고민과 글이 뒤따라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2005년을 전후로 등장한 1970년대생 시인들이라고 말하기도 어려운데, 이들이 보여주었던 화법은 어느덧 주류 문법이 되었고, 그 미학적 갱신이 더이상 이루어지지 않는 상황에서 오히려 1965~70년에 태어난 시인들의 활약이 두드러지는 것은 매우 독특한 현상이라고 여겨진다.

 

p.38 : 자연스러운 애도가 고의로 지연되고 왜곡되는 시대, 시인들에게 가장 강력하게 요청되는 자질은 바로 '연대의 감각'과 '우울증적 합체의 정서'다. 상실한 대상을 떠나보내지 않고 끌어안아야 하며, 자기 학대의 모멸감에 시달리면서도 자아와 합체시키고, 벌거벗겨진 타인이 건네주는 고통을 의연히 나눠 받으며 같이 않아야한다.

 

자기 안의 타자와 타자성에는 오히려 익숙하지만 삶의 공간에서 실제로 대면하는 타인에게는 무관심하거나 취약한 면이 있다. 특히 문화나 취향이 매개되어 있지 않는 관계를 난감해하는 경향도 지적할 만할 것이다.

 

P.40 한국 시가 10년간 꿈꿔온 미래는 모두 다 헛것이었을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그 성취는 분명 축적되어 다음 세대로 전수될 것이고 호명ㅂ다지 못한 감각은 잠재되어 있다가 홀연 다른 계열을 만들면서 한국 시의 활력을 새롭게 접붙이며 나타날 것이다. 그러나 아마도 이들 세대의 꿈은 당분간 잠행을 해야할 것 같다. 다만 벌거벗은, 몫 없는 자가 목소리를 내며 이 세대 앞에 등장할 때, 아니 마침내 이 세대가 미래를 완박하게 박탈당한 채 몫 없는 자가 되어서 누군가에게 자기 목소리의 기입을 울면서 간청해야 할 때, 그 때도 이 달아나는 혼종적 주체들은 전복적일 수 있을까? 이제 이 지점에 대해서도 고민해야 할 때가 온 것이 아닐까 싶다. 정체성, 그것이 전복인 시대가 되었다니 이렇게 비참한 일이 있을까, 라고 이들은 말할 것만 같다. 나는 고개를 저으려다가 그만 끄떡이고 만다.

 

P.55 나는 황인찬의 시에 대해 "그는 무례함이라고는 알지 못하는 사람처럼 이 세계를 지긋이 지켜본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의 시를 읽다보면 그것이 어떤 대상이든 간에 주체와 대상사이에 동시적으로 발생하는 '이상한 격리감'을 느낄 수 있다. 이렇게 설명할 수 있으라라. 그는 지상의 모든 존재를 신성의 잠재적 구현자로 예감하고 있기 때문에 감히 신을 만질 수 없는 수행자처럼, 마치 울타리를 넘어가서는 안 된다고 믿는 신자처럼 어떤 종교적인 염결성으로 대상을 바라본다고 말이다. 공백은 격리감으로 뒤바뀐다. 그야말로 신성한 격리감이다.

 

그러나 황인찬의 시적 주체는 다르다. 길거리에서 만난 죵고인에게 시적 주체는 화를 내지도, 짜증을 내지도, 동의하지도, 반박하지도 않는다. 그의 생애를 미루어 상상하거나, 자신의 감각이나 내면으로 빠져들지도 않는다. 마치 깊은 내면이라는 걸 아예 가지지 못한 사람처럼. '그것은 원래 그런 것' 혹은 'A는 그저 A로 돌아온다'는 식의 매우 단순하고 엷은 반응만 보일 뿐이다. 그리고 그냥 집으로 돌아온다. 그런데 어째서 아름다운가?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저녁 다섯시, 나느 돌아온다"라니 어쩐지 여기에는 '이상한 무기력과 무능감이'이 배어 있지 않은가? 무력한 자는 대상을 그저 두고볼 뿐이다. 뭘 해도 크게 변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안기에 그렇다. 절망보다 온순하지만 , 더이상 화를 낼 힘도 없다는 점에서 절망에 끝에 도달하게 될 곳이 무기려그 혹은 무능감의 자리 같다.

 

p.58 나는 이것이 변화한 시대감각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우리가 황인찬의 시에서 신성 혹은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면 일차적으로 그가 '하강하는 중간 계급'의 시대적 정서를 자기도 모르게 미적 형상으로 반영하고 가시화해내었다는 사실 떄문이지만 덧붙여 그의 시가 역설적으로 바로 눈앞의 현실 외에 다른 것은 없을 것이라는 관점을 통해 프롤레타리아로 하강할 가능성이 높아진 중간 계급의 집단적 불안과 두려움을 차단하고 위로 했기 때문일 것이다.

 

P.63 송승언의 시에는 시적 주체 자신뿐 아니라 대상과 세계 또한 온통 부재하는 감각 속에 있다. 아무것도 명백한 것은 없고, 오로지 부재한다는 사실만이 명백하다. 따라서 관계는 발생하지 않고, 의미는 축적되지 않으며, 배후는 지워진다. 언어는 필연적으로 단순해지며 서사는 흩어진다. 때문에 문장의 기묘한 배치나 섬세한 단어 선택이 부각된다. 어쩔 수 없는 '미니멀리즘'이 탄생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슬픈 아름다움을 감지할 수 있다면 그것은 바로 '몰락하는 중간 계급'인 우리 자신에 대한 서글픈 연민 때문일 것이며 이 세계에는 더이상 기대할 것이 없다는 허무한 현실 감각을 송승언의 시가 환기하기 때문일 것이다. 

 

P.66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성공도 없겠지만 대신 실패할 필요도, 실패의 가능성도 없다. 오히려 어떤 희미한 '전능감'을 체험하게 된다. 최선을 다하면 성공하겠지만 최선을 다하지 않았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실패할 이유도 없고, 그렇게 하면 스스로의 나르시시즘을 상처 없이 보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바로 이런 이유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성스러운 아름다움을 간직하게 된다. 송승언은 빛, 물, 순백, 눈부심, 백저와 같은 이미지를 자주 소환하는데 이것은 '하지 않음의 전능감'이 빚어내는 아름다움-그러나 서글픈 결과물들이다. 몰락하는 중간 계급의 서글픈 파토스는 바로 이 지점에 고인다. 송승언의 시를 읽다보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데 기묘하게 서글픈 순간들을 자주 만나게 된다.

 

지금 젊은 세대게에는 실패를 '선택'할 여유가 없다. 점점 잔혹해지는 대한민국적 현실에서는 한번 탈락하면 영원히 실패자로 남기 쉽고, 게다가 실패가 기록으로 남는 초가시화된 사회에 살고 있다. 그저 버림받은 채로, 탈출조차 꿈꾸지 못한 채 이 현실 속에 존재한다. 살아간다기보다는 그저 존재하는 것. 당분간은 이렇게 버티어야 하는 것. 이 무기력과 무능감을 어떻게 해야할 까. 송승언의 싲거 주체는 바로 '열심히 한다'가 아니라 '열심히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마음으로 지금 현실을 견딘다. '몰락하는 중간 계급'의 자존감은 이렇게 보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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