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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책메모]

책 읽기 독후감 : GV 빌런 고태경

by 아주작은행성 2021. 7. 28.

P17 : 대부분 직관적으로 끌리는 어떤 이미지에 집착하는 사람들이 감독이란 족속들이다. 인물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걷게 할 것인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걷게 할 것인지, 모든 숏에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다.

 

P33 :

이게 영화냐? 단막극 드라마 같다.”

박원호 교수가 자비를 베풀어 포문을 열자, 둑이 무너지듯 코멘트들이 쏟아졌다. 30분짜리 단편을 위해 두 달 넘게 편집했는데, 일주일도 편집하지 않는 텔레비전 드라마보다 못하다는 소리를 들었다. 아무도 모를 몇 프레임 차이를 가지고 고민하면서 나는 무엇을 위해 컴컴한 편집실에서 그 많은 시간을 보냈던가? 조병훈은 눈이 썩는다” “한교영의 수치다” “너는 방송국에 갔어야 했는데 왜 여길 왔냐” “너 대신 떨어진 애들이 이걸 보면 너를 죽이고 싶을 것같은 말을 마구 뱉었다. 심지어 재촬영을 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왔지만, 배우들과 스태프들이 스케줄을 다시 맞출 수 없었고 어떤 마술을 부려도 현장의 그 공기를 재현할 수는 없었다.

그날 뒤풀이에서 세상이 무너진 것처럼 술을 마시고 전부 게워냈다. 수많은 위로의 말을 들었지만 내게 각인된 말, 지금까지도 나를 괴롭히고 있는 저주 같은 그 말은 필름이 끊기기 전 들었던 조병훈의 말이었다.

 구린 영화를 찍으면 구린 사람이 되는 거야

 

P34 :

영화감독이 하는 일이 뭐라고 생각하니?”

갑작스러운 물음에 나는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촬영은 촬영감독이 하고, 연기는 배우가 하고. 감독은 선택하는 사람이야. 그런데 선택에는 정답도 없고. 그래서 어렵지.”

인생처럼요?”

박 교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수많은 사람들이 왜 감독의 말이 듣겠어. 남들보다 잘 선택해야 돼. 선택의 프로가 되어야 해.”

 

P41 : 승호는 친구나 동료가 더 편한 사이였다. 아니, 사실 나는 승호를 영화 동료로서도 인정하지 않았다. 편집하면서 다른 동기들에게만 가편집본을 보여주고 승호에게는 피드백을 물어본 적도 없었다. 다행히 그 일 이후에도 승호는 서먹하게 굴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렇게 한쪽이 크게 상처를 받지 않고 다시 친구처럼 지낼 수 있는 건 정말 드문 일이었다.

 

P47 : GV 빌런들, 도대체 왜 그러는 걸까, 자기 영화 지식을 뽐내고 싶으면 평론가가 될 일이고. 대화가 하고 싶은데 할 사람이 없으면 돈을 내고 심리 상담을 받을 일이지. 왜 극장에서 남에게 피해를 주는 걸까.”

내가 비아냥거렸다. 빌런들의 공통된 특성은 남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는 거다. 아니면 알면서도 자신이 더 중요하거나. 그들도 영화를 사랑하는 걸까. 사람들에게 욕먹는 걸 즐기는 걸까. 그냥 사회성이 떨어져서 분위기 파악을 못하는 걸까.

 

P49 : 감독은 영화를 만들 때나 감독이지.

영화 만들 생각을 하는 것만큼 신나는 일이 또 있을까. 정말로 영화를 만들고 싶어졌다. 기회가 없으면 내가 기회를 만들어야지.

 

P59 : 동준은 봉준호, 최동훈 같은 유명 감독들하고도 웃으며 악수를 했다.

동기들 몇몇은 단편 시절부터 프로듀서들에게 명함을 받고 활발히 미팅을 했다. 그래본 적이 없는 나는 위기감을 느끼며 우주에 쏘아놓은 미지의 신호를 기다렸다. 왜 내게는 나타나지 않는지, 그들은 도대체 어떻게 생긴 존재들인지. 영화 <컨택트>에서 봤던 미지의 외계인, 문어처럼 생긴 헵타포드를 상상해봤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마침 민머리를 한 사내가 다가왔다.

 

P89 : “건축 바닥 진짜 힘들죠. 개인 생활이라고는 전혀 없고, 박봉에, 야근, 철야. 업무 강도도 장난 아니고……, 나는 건축이 약간 영화 비슷한 구석이 있다고 생각해요. 현장에 대한 로망이 있고, 산업에 더 가까우면서, 또 전공자들은 자기가 예술 비슷한 걸 하고 있다는 감성도 있고.”

 

P98 : “극장이라는 곳이 참 재미있지. 결국 우리는 스크린에 쏘아진 빛을 보기 위해 일부러 어둠 속으로 들어가는 거 아닌가.”

 

P102 : 나는 같이 멈춰 서서 중얼거리고는 새삼 내가 받는 취급을 당연하게 생각해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고태경은 각자 제 몫이 있다는 것을 강조했다. 조병훈은 학생들에게 독설을 퍼부으며 선생으로서 자부심을 느꼈을까. 우리는 빛이 가득한 지상으로 올라왔다. 눈이 부셨다.

 

P104 : 내가 고태경에게 놀란 점은 패배 의식이나 자격지심이 거의 없다시피 한 거였다. 나는 그가 GV에 나타나서 질문하는 게 비틀린 질투나 원한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그의 질문은 비난이나 조롱이 아니었고, 자신의 지식을 드러내고 뽐내기 위함도 아니었다. ‘저 연출자는 어떤 생각이었고 자신이라면 어떻게 했을까하는 영화 제작을 시뮬레이션해보기 위한 질문이 대부분이었다. 그는 GV 시간에 제작과정에 대해, 현장에 대해, 후반작업에 대해 꼬치꼬치 물었다. 극장이 곧 그의 영화학교였던 것이다.

 

P109 : “왜 좋아하는 영화 리뷰가 아니라 이런 걸 해?”

이런 거라는 내 표현에 기분이 상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윤미는 별로 개의치 않았다.

이게 더 인기 있어. 자극적일수록 조회수가 나와. 사람들이 좋아해주고, 돈도 되고.”

윤미는 시니컬하게 덧붙였다.

그게 더 잘 팔리는 세상이니까

그래. 어떤 것에 대한 사랑보다는 조롱과 냉소가 더 쉬우니까. 그 말에 어느 정도 동의하는 현실이 서글펐다.

넌 요즘에 어떻게 지내?”

윤미의 물음에 나는 다큐멘터리를 찍는다고 말했다. “웬 다큐?”하고 묻는 윤미에게 나는 자초지종을 말해줬다. 고태경에 대해 소개할 때, 나는 더 이상 비웃으며 말하지 않았다.

그거 돈 받고 찍는 거야?”

눈이 동그래진 윤미가 물었다.

아니…… 그냥 찍는 거야. 독립영화야.”

제작지원을 받는다고 당당하게 못 말하는 게 아쉬웠다.

너 대단하다. 그럼 취미로 하는 건가?”

취미로 하는 건 아니고…… 하고 싶어서 하는 거야.”

돈을 못 번다. 하고 싶어서 한다. 그게 취미 아니야?”

 

P114 : 윤미와 헤어져 을지로에서 시청까지 걸어갔다. 노포들을 지나 철거되고 있는 재개발 구역을 지나면, 8차선 대로를 끼고 까마득하게 높은 빌딩 숲이 펼쳐진다. 유튜브 브이로그 시대에 두 계절 동안 돈 한 푼 벌 수 없는 독립 다큐멘터리를 찍고 있다니. 재개발되고 있는 풍경들 사이에서 내가 멸종된 공룡 화석처럼 느껴졌다.

 

P119 : 트랙을 도는 고태경은 건재함을 과시하려는 듯 복싱 자세를 취하고 허공에 주먹을 쉭쉭 날리기도 했다. 그는 무엇과 싸우고 있는 걸까.

한참을 뒤처진 내가 멈춰 서서 헉헉 숨을 몰아쉬었다. 그의 귀에 이어폰이 꽂혀 있지는 않았지만, 음악이 흐르고 있는 것 같았다. 그가 완주 후 두 팔을 번쩍 들어 올리며 발을 구르는 순간 나는 확신했다. 그의 머릿속에 <록키>의 영화음악이 울려 퍼지고 있다는 것을.

 

P125 : 그렇지만 평생 공부를 했으면 그것을 펼쳐야 하잖아요, 라는 말이 내 목국멍까지 나왔다가 삼켜졌다. 나태하지 않고 끊임없이 배우려는 사람, 평생 공부하겠다는 태도가 나름 멋지다고는 생각했다. 하지만 영화를 만들지 못하면 다 쓸모없어지는 것 아닌가, 제작되지 않고 컴퓨터 폴더에만 담겨 있는 시나리오처럼. 평생 공부해서 GV빌런으로만 발현되는 것은 안타깝지 않은가.

 

P125 : 말은 그렇게 씩씩하게 했지만, 고태경은 쓸쓸해 보였다. 단팥죽을 한 그릇 더 시켜서 고태경과 나눠 먹었다. 슬퍼지려는데 단팥죽이 달아서 다행이었다.

 

P138 : “작품 완성하려고 무릎까지 꿇었다고 했지? 그런 거 아무나 못해. 난 말이야, 이제 나한테 그런 기회가 주어지면 무릎 꿇는 거보다 더한 것도 얼마든지 할 수 있어, 진짜 부끄러운 건 기회 앞에서 도망치는 거야.”

 

P150 : 민 대표의 말 때문에, 아니 그 말 덕분에 나는 더욱 이 다큐멘터리를 보란 듯이 잘 완성해야겠다고 다짐하며 주먹을 꽉 쥐었다. 좌절하기보다는 왠지 더 힘이 났다. 역시 나는 반골 기질이었다.

 

P151 : “이번에는 잘될 줄 알았는데 말이야…… , 인생에 계획대로 되는 게 뭐가 있나?”

고태경은 애써 씩씩한 연기를 하듯 톤을 높여 말했다.

그래도 물론 영화는 계획대로 진행돼야 해. 모든 영화는 완성돼야 해

 

P156 : “사람이 목표를 잃어버리면 그때부터 확 늙는거야.”

 

P182 : 종현과는 떨어진 좌석에 배정됐다. 비행기 안에서 심한 몸살이 걸린 것처럼 아홉 시간 동안 한 번도 깨지 않고 쓰러져 잤다. 인천 공항에서 그대로 종현과 헤어졌다. 기억에 남는 마지막 뒷모습 같은 것도 없이, 그게 종현과의 마지막이었다.

 

P197 : 현장에서 오케이가 아닌 것은 편집실에서도 오케이가 아니었다. 보는 사람이 몰라도 나를 속일 수는 없었다.

영화를 찍으면서 드물게 그런 순간들이 있었다. 좀처럼 확신을 못갖던 내가 배우의 감정과 카메라의 움직임,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 프레임에 들어오는 햇빛의 반사, 지저귀는 새 소리까지 모든 게 만족스러워 시원하게 오케이를 외칠 때가. 그렇게 얻은 화면이 영원한 지속의 순간이 되어 스크린에 상영될 때, 그 쾌감은 영화 만들기라는 미친 고생을 다시 하게 만드는 희열이 되었다.

삶에서도 확신을 가지고 오케이를 외친 순간들이 드물게 있었다. 무언가 좋다는 감정, 누군가를 좋아하는 감정을 느끼는 순간들, 사람들은 그래서 무언가를 혹은 누군가를 사랑하는 게 아닐까. 태어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 만큼, 불확실한 생에 확신이라는 것을 가져보고 싶어서. 결국 영화를 만드는 것은 많은 선택지 앞에서 내가 좋아하는 게 뭔지 고백하는 것이었다.

삶은 엉터리고 대부분 실망스러운 노 굿이니까 사람들은 오케이 컷들만 모여 있는 영화를 보러 간다. 우리가 영화 같다’ ‘영화 같은 순간이다라고 하는 것은 엉성하고 지루한 일상 속에서 오케이를 살아보는 드문 순간인 거다.

 

P202 : 영화는 내게 좋은 것만 줬는데. 영화가 나한테 상처를 준 게 아닌데. 영화가 미워지고 극장도 안 가게 되더라. 영화도 밉고 나도 밉고, 그저 영화가 좋아서 그다음은 생각도 않고 영화학교에 들어갔어. 돌아보면 난 그다지 감독이 되고 싶지도 않았어. 꼭 감독이 돼야 하는 거 아니잖아? 그게 행복의 척도도 아니고.

 

내가 사랑하는 걸 미워하는 게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걸 더욱 사랑하는 방향으로 가고 싶어. 행복해지지 않는다면 뭘 위해서 이 모든 일을 하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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