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마스[책메모]

책 읽기 독후감 : 윤수정 - 한 줄로 사랑했다 크리에이티브책 추천

by 아주작은행성 2021. 7. 26.

P.18 :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는 함민복 시인의 또 다른 시처럼 내 카피의 ‘꽃’은 경계에서 피었다. 민망함과 기죽음의 경계, 죽거나 혹은 나빠질 거라는 불길한 탄식과 박차고 오를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의 경계, 내가 믿었던 소망의 영화와 나를 괴롭히고 발 걸던 세상의 경계, 심의와 상상의 경계.

 

P.27 : 우연은 반드시, 언젠가는 운명이 된다. 다만 그 언젠가의 트랙이 다양할 뿐이다. (중략) 우연이라는 점들이 운명이라는 점묘화에 명암과 색을 넣는다. 오랜 시간이 걸려 완성된 운명은 그만큼 깊고 풍부한 그림을 안겨주리라. 미약해 보이는 오늘의 일상이 믿지 못한 감동의 한 점으로 달리고 있다고, 나는 믿는다. 오랜 우연을 달려 찾아온 믿지 못할 내 결혼을 핑계 삼아

 

P.31 : <하루>는 유한함에 도전하는 영화의 오기를 제목부터 말한다. 연인이 유학을 간다거나, 군대에 간다거나, 전근을 간다거나, 등등의 공백으로도 사랑을 망설이는 게 보통 사람들이다. 시간의 무한한 여로의 작은 못 하나 박혀 있지 않을 것을 확인해야 사랑을 시작한다. 사실 그 여로는 가려져 있을 뿐 그 끝이 내일일지도 모르는데. 우리는 시간의 담보를 최대한으로 받아두고 시작하려 한다. 영원의 시간을 당연하게 기대하며…

 

그리고 사랑이 영원에 도달하지 못한 채 끝나면 슬퍼하고 원망하며 절망하고 후회한다. 하지만 사랑은 애초부터 시간의 나무에 자라는 열매가 아니었다. 사랑의 기쁨과 의미는 결코 그 시간에 있지 않다. 시간의 나무에 열리는 것들은 정, 의리, 의지, 인내, 극기… 그들은 사랑이 아니다. 비슷한 맛과 향을 낼지라도, 글들이 사랑이라는 나무의 거름이 될 수 있을지라도.

 

P.32 : 음악이 침묵으로 더 많을 것을 이야기하고 시가 행간에 더 많은 뜻을 품듯, 사랑도 부재의 순간, 더 많은 마음을 전한다. 여백이 길수록 사랑은 훼손으로부터 안전하다. 그러므로 이별은 사랑의 완성을 위한 신의 한수다.

 

P.42 : 가격으로 치면 영화는 고급 소비재가 아니다. 책 한 권, CD 한 장보다 저렴하고 리필이 되는 카페의 커피 한 잔 가격이니. 그러나 관객들은 영화에게 십만 원짜리 공연 혹은 수백만 원짜리 해외여행에 버금가는 새로움과 충격을 느껴야 재미있다고 말한다. 커피가 맛이 없으면 ‘맛 없네’ 혹은 ‘커피가 다 그렇지 뭘’ 하고 말 사람들도 영화가 나를 미치고 팔짝 뒤게 만들지 못한다 느껴지면 객석이나 극장 화장실 변기를 파손하질 않나, 상영 중간에 극장 문 활짝 열어 스크린에 빛을 끼얹고 나와 소리지르며 환불을 요구하질 않나. 인터넷에 돈 아깝다고 거금을 잃은 투자자처럼 분노의 댓글을 단다.

*아마 나의 시간을 쏟아서 그런 게 아닐까? [행성의 생각]

 

P.44 : 다르게 생각하라, 남이 못하는 걸 하라. 광고를 비롯 크리에이티브 전반의 분야에 뛰어든 사람들이 목숨 걸고 지키는 신조들이다. 그러나 영화는 좀 다르다. 다르게 생각하고 남이 못하는 걸 하기 전에 ‘같은 생각, 다 같이 하는 걸’ 찾아야 한다. 나의 마음과 너의 마음이 같이 느끼는 것, 나의 생각이 너의 생각과 통하는 지점, 나와 사물이, 너와 세상이, 오늘과 어제가, 내일과 오늘이 같은 것이 무엇인지 그 공통점과 공감대에서 출발해 달려가는 상품. 그것이 영화다. 처음 만난 사람들과 대화를 시작할 때 우리는 그 사람과의 공통적인 화제를 선택한다. 그중에 하나는 나도 보고 그들도 보았을 법한 대중적문화 혹은 나도 좋아하고 그들도 좋아할 누군가, 나도 관심있고 그들도 관심을 가질 어떤 이슈 등등등. 그렇게 마음이 마음에게 말을 거는 화제가 될 수 있는 것, 그것이 영화다.

 

P.48 : 백수와 종이 한 장을 나눠 쓰는 사이다. 게다가 일에 대해 느끼는 사소한 감정의 부스러기들을 같이 껍질 벗기고 도란도란 상의할 누군가가 없다.

 

P.52 : 마케팅은 영화를 위한 또 다른 한 편의 영화인 셈이다. 마케팅이라는 영화 역시 발단, 전개, 절정, 결말의 구조가 있고 클라이맥스가 있고 대중을 붙잡고 놀라게 하고 만족시킬 비장의 무기들이 있어야 한다. <물고기자리>의 티저에서는 ‘사랑, 그 이상’을 심었다. 그렇다면 메인은 결국 모른다고 숨겨둔 ‘사랑, 그 이상’을 보여줘야 한다. 아무리 숙제가 하기 싫어 도망쳐도 개학은 오기 마련이다. 아무리 공부가 싫어도 시험은 온다. 반드시 온다. 그 유년의 진리가 학교를 졸업한 뒤에도 천륜으로 이어지는 직업이다. 영화 카피라이터는, 아무리 도망쳐도 개봉은 온다. 숨겨둔 문제도, 결국은 풀어야 한다.

 

P.59 : <블레어 위치>의 공포의 핵심은 결국 ‘사라졌다’는 것. 그렇다면 <큐브>는 무엇일까? <큐브>의 공포는 폐쇄된 공간에 가둬진 옴짝달짝할 수 없는 공포였다. 그들은 움직여서는 안 된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 탈출할 수 없으니까. (중략) 영화 전체의 이야기를 버리고 단 한 장면에 승부를 걸기로 했다. 영화의 오프닝 장면, 한 남자가 발을 내딛자마자 깍두기처럼 네모나게 쪼개지는,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충격이라서 객석에서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그 장면을 카피에 담기로 했다. 결국 공포영화는 한 컷의 승부. <캐리>에서 붉은 페인트를 뒤집어쓴 여주인공, 무덤 밖으로 손이 튀어나오는 라스트신, 그리고 <샤이닝>에서 마지막 복도에 걸린 사진 속의 잭 니콜슨의 미소, <사이코>의 샤워실 살인… <큐브>에서 그 한 컷은 단연 오프닝의 죽음이었다. 그걸 옮기자. 이 카피를 쓰면서 그 약하디약한 육체가 나 같아서 차마 찢긴다거나 쪼개진다는 말을 못한 채 그저 부서진다고 돌려서 말해버렸다. ‘움직이는 수간, 당신은 갈가리 찢긴다’, ‘움직이는 순간, 당신은 가루가 된다’라는 말 대신 ‘움직이는 순간, 당신은 부서진다’고 썼다.

 

P.73 : ‘성공이란, 내가 가장 즐기는 일을 내가 가장 감탄하고 존경하는 사람들 속에서 내가 가장 원하는 방식으로 행하는 것’이라는 정의를 책에서 읽고 메모해둔 적이 있다.(서적 제목과 발언자 이름은 적혀 있지 않아 명기하지 못한다)

 

P.117 : 피 터지게 준비해서 PT라는 경쟁 프레젠테이션 준비가 끝나 반나절의 휴가를 받았을 때 역시 그곳에 달려갔다. 열심히 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자고 있었다. 깨달았다. 이제 영화의 수혈로도 감당할 수 없는 말기의 피로를 가졌구나. 무너지고 있구나. 금이 가고 있구나. 몸과 마음을 가리지 않고 부딪히며 승진, 연봉, 인사고과 같은 쉴 틈 없이 개막하는 경기들을 달리다보면 몸도 마음도 성하기가 쉽지 않다. 회사 밖에서는 좋은 사람이라며 함께 웃을 인연들도 서로의 발을 걸고 옷을 끄잡는 악연으로 얽힐 수 있다. 그러나 가장 견딜 수 없는 것은 내가 그 안에서 뒤질세라 거들고 있는 모습이다. 나 역시 누군가에게는 폐허의 부분이고 지진의 균열이리라. 짐을 꾸려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중략) 가야할 곳이 옳아서가 아니라 지금, 내가 소속한 곳에서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확신 때문이었다.

 

P.122 : 카피를 완성하며 늘 되뇌이는 도덕경의 낳았지만 소유하지 않는다는 ‘생이불유’처럼.

 

P.128 : 글자로 그림을 그릴 수 있을까. 글자로 노래를 부를 수 있을까. 글자로 선을 긋고 색을 칠하고 글자를 읽는 사람들의 마음에 사진을 박히게 할 수 있을까. 그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게 된 것은 화한 농담들이 기화되지않고 마음에 고여 또로록 넘치면서부터였다. 나는 그 넘쳐흐른 질문들의 답이 ‘예’라는 것을 믿는다. 예를 들어 ‘분수처럼 흩어지는 푸른 종소리’의 충격. ‘정수박이’라는 단어 그리고 폭삭 주저앉았다의 ‘폭삭’의 느낌. 글자는 그림을 그릴 줄 안다. 내가 솜씨가 없을 뿐이다.

 

P.187 : 영화를 마케팅한다는 것은 음유시인의 역할을 현대로 이어받은 게 아닐까라는 생각을 한다. 호메로스가 시로 펼쳐주는 트로이의 전쟁, 조선 후기 아낙들이 대청마루를 가득 메우게 한 소리꾼의 ‘춘향전’… 그리고 한 줄의 줄거리로 요약되어 사람과 사람 사이에 추천과 비추천을 넘나드는 영화는 이야기라는 거대한 족보로 이어지는 가족들이다.

 

P.249 : 결국 잘못과 후회는 살아남은 이들이 짊어져야 할 몫이다. 부모는 산에 남지만 아들의 등은 결코 가볍지 않다.

SMALL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