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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책메모]

책 읽기 독후감 : 정재찬 - 우리가 인생이라 부르는 것들 힐링책 추천

by 아주작은행성 2021. 7. 26.

P.16 : 모든 ’먹는’ 동작에는 비애가 있다. 모든 포유류는 어금니로 음식을 으깨서 먹게 되어 있다. 지하철 계단에서 쭈그리고 앉아서 자장면을 먹는 걸인의 동작과 고급 레스토랑에서 냅킨을 두르고 거위간을 먹는 귀부인의 동작은 같다. 그래서 밥의 질감은 운명과도 같은 정서를 형성한다. 전기밥솥 속에서 익어가는 그 평화롭고 비린 향기에 나는 한평생 목이 메었다. 이 비애가 가족들을 한울타리 안으로 불러모으고 사람들을 거리로 내몰아 밥을 벌게 한다. 밥에는 대책이 없다. 한두끼를 먹어서 되는 일이 아니라, 죽는 날까지 때가 되면 반드시 먹어야한다. 이것이 밥이다. 이것이 진저리나는 밥이라는 것이다 [김훈,<밥1>,<라면을 끓이며> 중]

P.18 : 그 지겨운 밥벌이 하나 변변히 할 수가 없어 인간적인 자존감마저 무너짐을 겪고 있는 것이 우리 사회 보통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P.24 : 그래서 지금 우리 젊은이들은 유예하는 청춘들입니다. 취직이 안 돼 졸업을 유예하고, 결혼이 부담스러워 연애를 유예하고, 집을 장만하기 위해 독립을 유예하는 등, 삶을 위해 꿈을 유예하고 사는 청춘인 겁니다. 꿈을 이루기 위해 도전할 의지를 갖기보다 꿈을 접어서라도 안정된 삶을 사는 것이 꿈이 되어버린 세대.

P.28 : 자신이 기록한 것은 업의 본질을 지키며 살아가고자, 발버둥 치다 깨져나가는 바보 같은 사람들의 처음이자 마지막 흔적이라고. 자신이 도덕적으로 우월한 존재여서라거나, 각별히 책임감이 강해서가 아니라, 이 직업을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서, 이 직업의 본질이 요구하는 것을 지키는 것 뿐이며, 그러려면 이렇게 할 수밖에 없다고 그는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페스트의 의사 리외는 랑베르 기자에게 이렇게말합니다. “이 모든 일은 영웅주의와는 관계가 없습니다. 그것은 단지 성실성의 문제입니다. 아마 비웃음을 자아낼 만한 생각일지도 모르나, 페스트와 싸우는 유일한 방법은 성실성입니다.

“내 경우로 말하면, 그것은 자기가 맡은 직분을 완수하는 것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P.33 : 우리 직업의 본질이란, 이처럼 사람들이 모두 같이 살려고, 나도 살고, 너도 살리려는 데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P.45 : “죽어라 일하는데 왜 나는 죽지도 않고 왜 일은 줄지도 않는가?” 많은 이들이 ‘좋아요’를 누르자 내친 김에 그에 대한 답도 올렸습니다. “일은 하면 할수록 늘기 때문”이라고. 갓 취업해서 제대로 일할 줄모르면 선임들이 격려해줄 때 하는 말이 그것 아닙니까. “괜찮아, 일은 하다 보면 늘어”라고

아, 정말 일은 늡니다. 하면 할수록 실력이 느는 게 아니라 정말 일은 늘면 늘지 줄어드는 법이 없습니다. 잘하면 잘하는 대로, 못하면 못하는 대로, 줄지 않는 것이 일입니다. 과로로 죽을 판인데, 과로하지 않으면 더 죽을 판으로 일이 넘쳐 어쩔 수 없이 과로라도 해서 일을 줄이려는데, 그러면 그새 일은 또 늘어나는 악순환인 겁니다.

P.59 : 일이냐, 삶이냐, 문제는 그 둘 간의 조화와 균형을 생각하지 않고 우리 인생을 일과 삶의 대립으로 간주하는 데 있습니다. 모든 것은 인생을 잘 살기 위한 것, 어차피 일도 인생이고 삶도 인생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인생을 사랑하는 자는 그 둘 중 어느 하나도 놓치지 않으며 편애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P.90 : 나이가 아무리들어도 부모 자식의 관계는 바뀌지 않지만, 그 위치는 바뀌게 됩니다. 자식이 부모의 부모자 위치에 서게 되는 날이 오는 겁니다. 보호자였던 부모님이 그리하였듯, 이제는 우리가 부모님의 보호자로서 사랑과 정성을 바쳐야 하는 것이죠. 이제는 내가 부모님의 발톱을 깎아드려야 할 때입니다.

P.95 : 내가 떠맡고 싶은 건 어머니가 아니라 어머니의 똥구멍이었다. 생판 남이 어머니의 똥구멍을 진저리를 치며 구박하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 그건 효도 따위보다 훨씬 진실하고 씩씩한 분노였다. 하필 항문의 고무줄이 빠질 건 뭐였을까, 다른 사람도 아닌 우리 어머니가 어머니에게 그건 얼마나 참을 수 없는 치욕이었을까. 나는 어머니가 어떤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다는 대가로라도 그 치욕을 다소나마 가려주는 일을 맡고 나설 수밖에 없었다.

P.113 : 결심이란 익숙한 것과의 결별을 의미합니다.

P.114 : 그러던 어느 날 이 늙어버린 두 자매의 집에 전쟁으로 남편과 아들을 잃고 오갈 데 없는 처지가 되어버린 바베트라는 프랑스 여인이 들어옵니다. 그녀는 요리와 집안일과 온갖 허드렛일을 다 맡아주며 14년을 그 집에서 지냅니다 그런 바베트에게 거액의 복권이 당첨되는 행운이 찾아옵니다. 고생 끝 행복 시작, 당연히 이제 그녀가 고향으로 돌아가리라 여기던 두 자매에게 바베트는 마지막으로 동네 사람들을 위해 요리를 대접하고 싶다고 말합니다.

놀라운 일은 그때부터 벌어집니다. 바베트가 주문한 재료들이 속속들이 도착하는데 면면이 진귀한 것들입니다. 소,닭은 기본, 거북이가 오는가 하면, 귀한 샴페인과 와인, 하얀 테이블보와 각종 화려한 은식기에 이르기까지 호화롭기 그지없습니다. 그동안 절제와 금욕, 검소하고 경건한 삶을 지켜오던 자매와 마을 사람들은 불안을 넘어 두려워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다짐을 합니다. 그녀가 정성껏 준비했으니 그 음식을 먹어는 주되 어떠한 표현도 하지 말자고.

하지만 바베트의 만찬이 진행되면서 그들은 무너지고 맙니다. 그녀의 요리를 한 입씩 베어물 때 마다 온몸에 밀려드는 감동으로 인해 영혼마저 행복하게 녹아내리는 겁니다. 누구보다도 크게 놀란 사람은 그 자리에 합석하게 된, 젊은 날 언니를 연모했던 장군입니다. 장군만이 이 요리가 과거 프랑스 최고 레스토랑 ‘카페 앙글레’에서 먹어본 그 맛이란 걸 알아차린 거죠.

바베트는 바로 그 레스토랑의 수석 요리사였습니다. 프랑스 혁명 이후 레스토랑 번성하게 된 것은 역사적인 사실이지요. 망명하는 귀족 주인을 따라가거나 부르주아 집안으로 들어간 요리사들이라면 모를까, 귀족 밑에서 일하던 수많은 요리사들이 혁명으로 인해 길거리로 쫓겨나와 개업하기 시작하면서 레스토랑이 유행하게 된 거랍니다.

바베트가 그런 대단한 요리사였으니 그 맛이 오죽했겠습니까. 음식이 주는 맛의 즐거움에 오롯이 빠지게 된 마을 사람들은 식탁에 둘러 앉아 처음으로 솔직한 속내를 꺼냅니다. 자신들이 지니고 있었지만 미처 알 수 없던 감각들이 막 깨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갈등과 박목, 불평과 불만도 사라지며 그들은 바베트의 식탁에서 마치 천국처럼 기뻐하며 하나가 됩니다.

감동적인 만찬이 끝났습니다. 하지만 바베트는 프랑스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아니 돌아갈 수가 없습니다. 이 만찬을 준비하느라 복권 당첨금을 모두 써버렸기 때문입니다. 자매는 얼굴이 창백해져서 말합니다. “바베트, 이제 다시 가난하게 살아야하잖아!” 그러자 바베트가 답합니다. “예술가는 가난하지 않아요.” 그리고 덧붙입니다. “자신이 최선을 다하면 사람들을 행복하게 할 수 있죠.” 천사의 축복이라도 내리는 듯, 창문 너머로는 흰 눈이 소복소복쌓입니다.

P.123 : 팝아트의 거장 앤디 워홀의 <캠벨수프 통조림> 연작을 떠올리곤 합니다. 현대사회의 대량생산 문화를 상징하는 그림이죠. 그런데 이 그림을 잘 들여다보면 다 똑같은 캠벨수프지만 하나하나의 맛은 다 다릅니다. 각각의 캔은 치킨 수프, 옥수수 수프, 조개 수프 등등 다양합니다. 하지만 그래본들 깡통 수프 맛입니다. 그렇다면 이 그림은 획일화를 표현한 것인지 다양화를 표현한 것인지 헷갈립니다. 이에 관해 그가 투명하게 답한 적도 없으니까요.

‘캠벨수프’와 함께 또 유명한 그이 작품이 <코카콜라>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한 바 있죠. “미국의 위대함은 만인이 평등하다는 사실이다. 이를 상징하는 것이 코카콜라다. 대통령도 억만장자도 엘리자베스 테일러도 일반 서민과 똑 같은 코카콜라를 마실 뿐이다. 더 비싼 돈을 줘도 고급 코카콜라를 마실 수가 없다. 이것이 미국의 자랑이다.”

대중문화의 풍요는 평등을 가져다줬습니다. 누구나 같은 코카콜라를 마시고, 캠벨수프를 먹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의 평등한 권력이 추가 점점 기울어져가면서 획일화의 위험이 다다르고 있습니다. 이것이 대중문화의 양면성입니다. 풍요는 다양화를 선물해주는 것 같았습니다. 코카콜라만이 아니라 다양한 청량음료를 만들어주었고, 다양한 수프를 만들어 주었죠. 그러나 그것들은 자기 생태계 내부의 다양화만 허락할 뿐, 골목식당과 집밥의 생태계를 위협합니다.

P. 134 : 결심이란, 살아온 나에 대한 부정이었고, 살아갈 나에 관한 긍정이었습니다. 그리기에 살아온 날들을 반성하며 비장하게 결심할 때면, 살아갈 날들은 늘 밝게 빛나 보였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좀 더 지나면 우리는 또 실망하고 반성하고 아마 또 똑 같은 결심을 새로운 각오로 하곤 하겠지요.

P. 136. 전작 <설국열차>에 비해, <기생충>의 실감이 더 강렬하게 다가오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상하공간의 수직적 넘나듦과 전복의 가능성이 전후공간의 그것보다 더 긴장감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차이는 <설국열차>의 비유가 알레고리에 가깝다면, <기생충>의 그것은 상징적이라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훨씬 더 풍요롭고 다양한 열린해석이 가능한 겁니다.

어쩌면 <기생충>의 공간 은유는 우리 마음의 구조를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프로이트의 개념에 따라 말하자면, 이 영화 속의 지상, 반지하, 지하는 각각 의식, 전의식, 무의식의 공간일 수 있고, 초자아, 자아, 이드의 관계로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잘 아시는 대로, 이드는 쾌락 원칙에 따라 움직이는 원초적 본능입니다. 삶의 본능인 에로스와 죽음의 본능인 타나토스가 함께 잠재해 있는 곳. 지하층의 생존욕과 폭력의 욕망이 바로 그런 것이죠. 그런 지하실이 있다는 걸, 아무도 알지 못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무의식의 세계는 그런 것이니까요. 반면에 초자아는 우리에게 허용된 경계선을 지어줍니다. 그러면서도 죄책감이나 수치심, 허약함, 의무감 등을 느끼는 원인이 되죠. 지상의 호화주택이 지닌 양면성이 그에 가깝습니다.

그러한 이드와 초자아 사이에서 중재자 역할을 하려 애쓰는 것이 자아, 바로 반지하라는 존재입니다. 한 번에 두 주인을 섬기지 말라 했거늘, 프로이트에 따르면 이 불쌍한 자아는 이드와 초자아, 그리고 외부세계 등 세 주인을 섬기는 상태이지요. 외부세계와 상호작용하면서 이드의 어둡고 무서운 본능을 억누르고, 초자아가 요구하는 대로 우리더러 안전, 책임, 존중 같은 걸 고려하게 만들면서 우리 자신을 지켜주는 것이 자아의 역할입니다.

자아는 이드를 통제하고 초자아가 지니고 있는 불안감과 죄책감 등을 완화해가며, 균형을 유지하려는 불쌍한 싸움을 지속하고 있는 겁니다. 통제되지 않는 저 무대의 지하세계, 자기기만에 빠져 무례하게 억압하고 무시하려고만 드는 지상의 세계 사이에서 말입니다. 그게 송강호를 비롯한 반지하 인생들, 바로 우리들 자아의 모습인 셈입니다.

그래서 <기생충>은 잘살든 못살든 바로 우리 모두의 문제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저 위선의 부르주아들과 다르다고, 저 거칠고 야만적인 지하 빈민층과 다르다고, 마름처럼 빈민층을 수탈하고 상류층에 기생해 사는 반지하 인생과 다르다고 안심하지 말라고 드리는 말씀입니다. 비웃지도 마시고요. 그게 다 우리들 마음속이라는 말입니다. 오늘도 어제도 내일도 한결같이 벌어지는.

P.139 : 냄새란 지울 수 없는 것. 내 의지와 노력과 무관하게 환경으로 인해 그저 내 몸에 배어버리는 그런 것. 삼결살집에서 회식하면 누구나 공평하게 냄새가 배는 법인 것을, 내 탓이 아니라 환경과 문화 탓인 것을, 마치 나의 잘못이나 결함이라도 되는 것처럼 취급당하고 차별당하는 것. 피부색이 달라서, 여자라서, 가난해서 선 밖으로 밀려나는 것.

그러나 아무리 밀어내도 소멸되지는 않습니다. 명민하게도 프로이트는 ‘억압’이란 단어를 씁니다. 누를 뿐입니다. 적당히 누르면 잠잠합니다. 하지만 너무 세계 누르면 오히려 튑니다. 터집니다. 조심해야 합니다. 안 그러면, 자꾸 선을 넘는, 아무리 막으려 해도 막을 수 없이 넘나드는 냄새를 잡으려다가, 그 빈대 같은 바퀴벌레를 잡으려다가, 그만 초가삼간, 아니 고급 주택 하나가 홀랑 다 타버려 재가 되는 겁니다. 의식이 미쳐버리고 마는 겁니다.

P.146 : 미국의 사회학자 스테판 메스트로비치는 <탈감정 사회>에서 이렇게 묻습니다. “오늘날 현대 사회에서 내가 느끼는 감정이 진짜 내 감정인가?”

매스컴이나 미디어는 내 감정을 조절하고, 아예 감정적 반응을 그들이 만들어 제공해줍니다. 뉴스앵커는 사건을 보도하며 “분개할 만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라고 이미 내 감정을 판단해 줍니다. 예능 프로그램의 자막에 주목해보십시오. 어느 샌가부터 우리는 그 자막에 따라 자동적으로 그에 걸맞는 희로애락의 감정을 보이고 있습니다. 미디어가 내 감정적 반응을 미리 포장해서 넘겨주는 셈인 거죠.

감정적인 카타르시스라는 것이 사라져버립니다. 마음속에 어떤 감정이 쌓여 있을 때 영화나 소설을 읽으면서 시원하게 울어버리고, 혹은 화를 내고 나면 무언가 해소되는 기분이 들죠? 그러면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탈감정 사회에서는 남이 만들어놓은 모호한 감정들 사이에서 세련되고 친절한 행동만 하게 될 뿐입니다.

감정을 표현하지 못하도록 하는 세계의 검열, 표현해도 들어주지 않는 세계의 무감각함과 공감의 부재. 그런 현실이 우리를 더 우울하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요? 그래서 점점 더 검열당한 것들을 지하실 밑으로 집어넣기만 하고 데모 한 번 일으키지 못하고 사는 것 아닌가요? 아니면 그와 반대로, 인터넷 악성댓글처럼, 감정과 이성의 차원이 아니라 감정에 미달한 것들은 이성적 판단 없이 마구잡이식으로 분노를 표출하기도 하죠. 그것은 정당한 데모가 아닙니다. 카타르시스라는 말의 가장 나쁜 의미에서 그것은 배설에 지나지 않습니다.

P. 163 : 관련성을 발견하기 전에는 우연한 사실들의 나열에 불과해 보이지만, 관찰을 잘하면 우연히 얻은 정보들 사이에서 진실을 발견하게 될 때가 있는 법. 그럴 때 쓰는 말이 바로 ‘세렌디피티’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어쩌면 당연하게도, 이 말이 인과론적으로 가장 합리적이어야 할 과학계에서 심심찮게 쓰인답니다.

페닐시린의 발견도 우연에 의한 것이었고, 아스피린도 세렌디피티였다는 겁니다.

P. 179 : 우리나라 교육의 가장 큰 문제점이 뭐냐고 물으면 저는 늘 이렇게 답합니다. “우리는 공부의 프로를 양성하는 데 실패하고 있는 게 아니라 아마추어를 양성하는 데 실패하고 있다”

이 아마추어란 단어는 프로보다 못한, 실력이 미숙한 자라는 뜻이 아닙니다. 원래 이 단어의 가장 좋은 뜻은 사랑하는 자, 곧 애호가라는 의미이지요. 바둑이나 조기축구든, 등산이나 낚시든, 요리나 꽃꽂이든, 뭐든 좋아하는 자는 못 말리는 법입니다. 그래서 바둑 아마추어, 곧 바둑 애호가들은 급수를 올리기 위해 스스로 더 힘든 묘수 풀이를, 그것도 매우 즐겁게 합니다. 사서 고생합니다.

P. 194 : 그런데 그러던 사이, 생각이 바뀝니다. 뜻을 이루기 위해 길을 찾는 것도 훌륭하지만, 이 길에서 뜻을 찾는 것도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하고 말이죠. 그 이후로 비로소 남들의 길이 아니라 내 안의 길에서 뜻을 찾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아, 산 정상은 내 갈 길이 아니었구나. 아, 그래서 이렇게 들길과 강 길을 지나게 된 거구나. 아 그래, 내 갈 길은 바다였는지 몰라. 다행이다. 하마터면 바다의 낙조를 보지 못할 뻔했구나, 어서 부지런히 바다를 향해 걸어가자꾸나.

P. 198 : 그렇게 오래 산 나무도 봄이 되면 푸른 잎을 답니다.

P. 198 : 세월은 안으로만 새기고, 생각은 여전히 푸르른 희망으로 가득 찬 사람, 그리하여 내년엔 더 울창해지는 사람. 그렇게 나이 들어가면 좋겠습니다. 어른으로 늙는 것이 아니라 어른으로 계속 커가면 좋겠습니다.

P. 217 : 여우는 인내심을 강조합니다. 침묵을 지키는 인내심, 침묵하면서도 함께 지낼 수 있는 인내심, 침묵 덕에 서로가 더욱 가까워질 때까지 견뎌내는 인내심 말입니다. 사랑은 속도전이 아닙니다. 서서히 신뢰를 쌓아가는 과정입니다. 오해할 일이 벌어지지 않을 정도로, 오해할 일이 벌어져도 오해하지 않을 정도로 말이죠. 하지만 여우의 말을 오해하면 안 됩니다. 오해하지 않기 위해서 침묵을 지키고 말을 안 하는 것이지, 오해해서 말을 안하는 것이 침묵이나 인내인 것은 아닙니다. (중략)

“우리 애기 좀 해”라고 말하기 전까지 보내는 침묵의 시간이 자기의 주장을 더 강화할 논리를 준비하는 시간이어서는 안 됩니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사태를 돌아보는 침묵과 인내의 시간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다시 대화를 시작할 때는 시비를 가리는 것이 아니라 시비를 덮은 자리에서 오로지 화해를 위한 이야기만 준비해가지고 나와야 하는 겁니다.

P.221 : 사랑론 / 허형만

사랑이란 생각의 분량이다. 출렁이되 넘치지 않는 생각의 바다, 눈부신 생각의 산맥, 슬플 땐 한없이 깊어지는 생각의 우물, 행복할 땐 꽃잎처럼 전율하는 생각의 나무, 사랑이란 비어있는 영혼을 채우는 것이다. 오늘도 저물녁 창가에 새 별을 기다리는 사람아. 새 별이 반짝이면 조용히 꿈꾸는 사람아.

P.233 : 하지만 현대 자본주의의 문화는 거래라는 관념에 기초하고 있죠. 하여, 사랑은 자유이지만, 자기가 지닌 교환가치의 한계를 고려하면서 서로 시장에서 교환할 수 있는 최상의 대상을 찾아냈다고 느낄 때에만 사랑에 빠질 수 있다는 비애가 성립되고 만 것입니다. 사랑할 대상을 발견하기 어렵다는 것은 이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고 사랑을 주고받으려면, 우리는 돈도 벌어야 되고, 일자리도 얻어야 되고, 그러려면 또 교육받고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거꾸로 말하면 그런 와중에 사랑도 해야 하는 겁니다. 사랑에 관해 굉장히 낭만적인 이미지를 설정해놓고, 거기에 내 존재를 다 걸게 만들어놓았는데, 거기에 모든 것을 걸 수 없는 환경이 되어버린 셈이죠. 이러니 사랑하기가 힘들 수밖에요. 사랑과 결혼을 위해 포기해야 하거나 준비해야 할 게 너무 많으니까요.

열심히 준비해 결혼을 목전에 두어도 문제는 줄어들기는커녕 더 늘어납니다. 맞벌이가 좋을까? 한 사람은 파트타임으로 일하는 게 어때? 승진해서 잘나가는 게 좋은 거야, 아니면 집에 와서 가사를 많이 하는 게 좋은 거야? 애는 낳아 말아? 몇 명 낳아? 키울 수 있어 없어? 그럼 누가 키워? 이처럼 수많은 외부 조건들이 내가 원하는 삶을 계속 내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게 하니까, 그러니까 당연히 선택지는 많고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건 없으니까, 그래서 점점 더 힘들어지는 겁니다.

P.240 : 결혼은 공존입니다. 오랫동안 한집에서, 한 이불에서, 같은 탕 안에서 함께 지내는 겁니다. 같은 체온끼리는 서로 온도를 느낄 수 없고, 뜨거운 탕도 오래 있다 보면 못 느끼는 법. 우리는 뜨거운 탕에 앉아 오히려 ‘시원하다’고 합니다. 식었다고 하지 않습니다.

얼음의 온도 / 허연

얼음을 나르는 사람들은 얼음의 온도를 잘 잊고, 대장장이는 불의 온도를 잘 잊는다. 누군가에게 몰입하는 일. 얼어붙거나 불에 타는 일. 천년을 거듭해도 온도를 잊는 일. 그런 일.

P.255 : 신문에서 매일같이 쏟아져나오는 사망 기사를 접하고도, 옆집 할아버지의 죽음을 마주하고도, 평소 타인의 죽음에 관한 눈물 한 방울 안 흘리던 우리가 가상의, 허구의 인물이 죽었다고 가슴 먹먹해하며 눈물을 훔치다니. 바로, 공감하기 때문입니다. 독서를 통해 그 주인공 입장, 아니 그 주인공 자신이 되어봤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통계와 설명과 설교에도 꿈쩍 않던 우리가 이렇게 변할 수 있는 기적은 인간이 갖고 있는 공감의 능력, 그에 기초한 소설과 드라마 덕입니다. 그러라고 소설이 발명된 것입니다.

P.263 : 리플리 증후군 및 그에 준하는 행태는 한 마디로 타인과의 비교 때문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오늘날 리플리 증후군의 바이러스는 널리 그리고 지속적으로 퍼져 있습니다. SNS라는, 그 바이러스가 활동하기에 딱 좋은 환경이 제공되고 있으니까요. 타인과의 비교가 이렇게 일상의 수준까지, 먹고 자고 보는 수준까지 구체적으로 끌어내려진 적은 일찍이 없습니다.

P.269 : 나일 수도 있고, 나인 척하는 나일 수도 있는, 내가 만들어낸 나일 수도 있고,내가 스스로 속인 나일 수도 있는 그 이름. 하지만 나는 부끄럽지 않다. 내 영혼이 걸어온 길이 이 지도 속에 다 담겨 있기 때문이다. 가끔 위선적이어도 좋고 위악적일 수도 있지만 절대로 나의 온도만 잃지 않는다면, 그렇게 매분 매순간 살아 숨 쉬고 있다면, 나는 당당히 노래할 수 있을 것이다.

왜 그럴까요? 페르소나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페르소나 없이 살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누구나 자기 역할에 어울리는 가면을 쓰며 살아야 합니다. 그 탈은 가짜나 사기나 허위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진 배역을 충실히 하기 위해 쓴 마스크인 겁니다. 그래야, 그것까지 포함해서야 비로소 내가 존재합니다. 나아가 성장하고 성숙하여 자기 완성에 이르게 됩니다.

P.274 : 그렇다면 거짓을 사랑하는 것에 있어서 ‘리플리’와 ‘방탄소년단(책 속에서는 페르소나)’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전자는 타인이 기준이 되는 것, 후자는 자신이 기준이 된다는 데 차이가 있습니다. 타인을 모방하고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는 것이 아니라, 남에게 나를 맞추는 것이 아니라, 그로부터 오히려 자유하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내가 기준이 되는 것,

P.305 : 몸의 감각이 곧 윤리일 때가 있습니다. 죄 지으려다가 저절로 손이 오그라들 때가 있는 않습니까. 몸에 밴 윤리의 감각이자 마음속 정언명령 때문일 테지요. 그래서 오므린 것들은 죄를 짓지 않습니다. 오므린다는 것은 공격과 거리가 멀기 때문입니다. 오므린다는 것은 온 몸을 돌돌 말아, 고작 제 한 몸, 또는 작고 어리고 여린 것들을 지키고자 할 따름입니다. 오므리고 오그리고 조아린 것들은 약합니다. 죄다 착해서 더욱 애처롭습니다.

P.307 : 소비는 소유의 한 형태다. 아마도 현대 잉여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소유 형태일 것이다. 소비는 이중적 특성을 지니고 있다. 써버린 것은 빼앗길 염려가 없으므로 일단 불안을 감소시켜준다. 그러나 한편 점점 더 많은 소비를 조장한다. 왜냐하면 일단 써버린 것은 곧 충족감 주기를 중단해버리기 때문이다. 현대 소비자는 나는 곧 내가 가진 것. 내가 가진 것은 곧 내가 소비하는 것이라는 등식에서 자신의 실체를 확인하는지도 모른다. -예리히 프롬, <소유냐 존재냐> 중에서

P. 345 : 더딘 슬픔, 그것이 상실에 대한 올바른 애도입니다. 끝내 허무하게 사라질지라도, 생명의 불 꺼지면 바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한동안은 연기로 남아, 무중력처럼, 시간이 멈춘 것처럼, 그렇게 잠시 그대와 함께한 추억들을 되새기며, 그대 떠나 텅 비어버린 이 세상의 공백을 채우는 것, 그것이 애도 아니겠습니까. 우리네 짧은 인생에도 그런 정도의 여운과 여백은 허락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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