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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자의 일기

오늘의 화자는 규칙을 적습니다.

by 아주작은행성 2023. 6. 7.

창밖에 비가 떨어집니다. 어두운 골목길에 말소리 같은 소음이 생기고 용암사 연등 불빛이 물방울에 맺힙니다. 비가 내리는 밤, 부슬비를 맞으며 산책을 나온 까닭은 아침에 너무 잠을 많이 잤기 때문이고, 오후 4시까지 잠을 자고 난 주말, 특히나 밖에 비가 오는 주말에는 머리가 아픕니다. 지루하다고 느껴지는 한 주의 끝에는 악몽들이 나를 잠 속으로 매몰고, 나는 밝은 낮에 눈이 아파도 눈을 뜨지 못합니다. 잠을 많이 자는 까닭은 세상이 너무 뚜렷한 탓일까요? 골목에 갇힌 찬 공기는 꿈에서 느꼈던 것과 비슷합니다. 꿈을 꾸는 기분. 눈을 감고 싶은 기분. 세포들이 눈을 뜨고 열이 오르네요. 반지하의 불빛에서 세탁기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고 어지럽고 차들의 경적이 유난히 크게 울리고.

 

사건이 일어나는 긴장감. 중심에는 내가 있고 걷고 걸으면 사건에 도달하겠죠. 가고 싶지 않지만, 의도대로 발은 움직이지 않고. 방관하듯 걸어갑니다. 모든 것은 예상에 없던 일. 달아나고 싶지만 계속 이어지는 일. 찬 공기의 막에 모든 것이 흐려지면 다 괜찮을 것 같다는 예감. 그렇게 점점 사건으로. 암전.

 

오늘은 너무나도 규칙적이지 않은 날이었습니다.

어긋난 박자를 따라가듯 속도가 다른 흑색의 차도와 백색의 인도 사이를 오가며 걷는 잠 속.

느리게 시작한 반주에 올라타 분주하게, 가끔 발에 채어 넘어지고.

 

빵빵, 삐뽀삐뽀, 사진 찍는 소리와 우산 펼쳐지는 소리가 하나가 되면 뒤돌아 갑니다.

막이 끝났으니까.

 

오늘의 화자는 규칙을 적습니다.

반주는 예정대로 끝나야 합니다.

스캣은 필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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